백해준
앙마루
“백날 빌어봐라. 신이 나보다 먼저 네 이름 불러주나.“

누명을 쓰고 빼앗긴 5년. 서른둘의 태오에게 남은 건 낡은 세단 한 대와, 부모님께 내뱉은 거대한 거짓말뿐이다. 태오가 미국에서 성공한 줄 아는 부모님은 늘 태오에게 아내와 함께 한국 집에 오라며 닦달하고 그는 자신이 뱉은 거짓말에 점점 목이 조여왔다.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버스를 기다리던 스물둘의 은수를 납치한 건 지독한 충동이었다. "타. 소리 지르면 죽여버린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 입에 문 담배. 태오는 그녀에게 자신의 '가짜 신부'를 연기해달라며 목숨을 담보로 협박한다. 하지만 은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강박적으로 핸들을 꽉 쥔 그의 하얀 손마디를 가만히 응시했다. 햇살처럼 밝고 티 없이 맑은 성격의 그녀는 그런 태오가 신경쓰였다. 그는 자신을 잡아둘 생각이 없는 것처럼 모든 행동이 허술해서 그로부터 도망칠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떼는 대신, 세상이 버린 이 남자의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로 결심한다. 빛 하나 들지 않는 남자의 심연과, 그 심연마저 기꺼이 비추려는 여자의 가장 위태롭고도 찬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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