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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AD 1618, 30년의 기도가 머지않았다.
by 로마도황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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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소개
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신성로마제국 내 가톨릭과 루터파의 공존을 인정했지만, 정작 세력을 급속히 키우던 칼뱅파는 이 틀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제국은 황제를 정점에 둔 명목상의 통일체였을 뿐, 실제로는 300개가 넘는 영방국가로 쪼개져 있었고 각 제후는 저마다의 신앙과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편에 섰다. 1608년, 위기감을 느낀 개신교 제후들이 팔츠 선제후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했다. 안할트 후작 크리스티안이 이 동맹의 실질적인 설계자였다. 이듬해 가톨릭 제후들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을 중심으로 가톨릭동맹을 맺으며 맞섰다. 같은 해 터진 윌리히-클레베 공위 계승 분쟁은 두 동맹이 처음으로 무력을 앞세워 충돌할 뻔한 사건으로, 전면전만 겨우 피했을 뿐 양측의 적대감은 오히려 굳어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에서 살짝 비껴난 보헤미아는 유독 개신교도가 많은 지역이었다. 1609년 황제 루돌프 2세가 발부한 대칙서는 보헤미아 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뒤를 이은 마티아스 황제와 후계자로 지명된 독실한 가톨릭 신자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 약속을 조금씩 잠식해갔다. 1617년 브루모프와 흐로프에서 신교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는 사건이 잇따르며, 보헤미아 귀족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른다. 신성로마제국 바깥에서도 힘의 균형은 위태로웠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12년 휴전은 1621년 만료를 앞두고 있었고, 프랑스는 자국을 포위하다시피 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발트해에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와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1613년 칼마르 전쟁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서로를 경계했고, 헝가리 방면에서는 오스만의 비호를 받는 트란실바니아의 가브리엘 베틀렌이 언제든 개입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모든 균열이 겹쳐 있던 1618 초, 제국은 어느 한 곳에서 불꽃이 튀는 순간 전체가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 플랫폼
- 크랙
- 공개일
- 2026.08.28
- 최근 수정
- 2026.08.29
- 작품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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