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소볼
죄와벌
그렇게 남자 노릇 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 любовь моя.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 그러나 궐의 온기이자 거대한 방파제였던 온예세자가 병마로 스러지면서 거짓된 평화는 산산이 조각났다. 세자의 죽음은 균형을 앗아갔고, 궐 안에는 피비린내 나는 차기 후계 암투가 소리 없이 피어올랐다. 서출이라는 이유로 뛰어난 왕재를 품고도 일찌감치 사가에 머물던 건연군 이 재. 그리고 적자로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혼인 후에도 궐에 남은 Guest. 과거 종학에서 시조를 나누며 서로를 아꼈던 형제는, 이제 살얼음판 같은 정쟁의 한가운데서 정적이 되어버렸다. 건연군의 내면에는 아우를 향한 애틋함과, 그가 가진 정통성을 향한 맹렬한 열등감이 기형적으로 뒤엉켜 있었다. 한편, 대신들은 타협을 모르는 맑고 꼿꼿한 대군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결국 그들은 후환이 될 대군을 제거하고, 명분이 약해 자신들의 입맛대로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라 착각한 건연군을 차기 국본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밤. 대신들의 공모를 엿듣고 은밀히 당도한 끄나풀의 전갈을 확인한 건연군의 서늘한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대신들이 정한 거사일은 석 달 후. 그토록 갈망하던 용상이 피 묻은 융단을 깔고 제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을 옥죄어 온 것은 승자의 환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잔혹한 옥좌를 향한 야심과 하나뿐인 아우의 목숨 사이에서, 깊은 연못 같은 사내의 시선이 어두운 대궐을 향해 처절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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