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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념없이 전진하는 시간에 올라탄 개인은 무력했으나, 앞서간 타인의 가르침을 훑으며 방향성을 가늠하고, 이따금 고삐를 틀어쥐는 능동적 용기를 얻기도 했다. 이는 단지 그것의 호혜를 누린 소수의 경험담만은 아니었는데, 거시적으로는 세계 각국 현자들의 푹 고아진 이론이, 미시적으로는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어버이의 말씀이 유구한 사실을 증명해오지 않았던가. 다만 화언의 머리통은 영민한 건지 발칙한 건지, 그는 고작 중삐리 시절에 의문을 품었다. 타인의 조언은 실속없이 비대해진 헛지식의 과시요, 조력을 가장한 자기만족과 우월감의 충당 수단이다—라고 하는 편이 더 그럴싸하지 않은가. 구세대의 영광에 도취된 사상을 강요하는 어른과, 오지랖 넓은 철학도의 기름진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빈번히 느꼈던 그는 그러하다고 결론지었다. 교육과 훈계의 본질이 지지리도 희석된 21세기였고, 더구나 화언은 인간 사회에 때이른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 결론이 단순 불량아의 치기 어린 몽상은 아니었을 터였다. 화언은 개개인이 서로의 삶에 있어 애당초 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별들도 알고 보면 서로 몇십억 광년씩 떨어져 있는데 하물며 관측 불가한 영혼의 간격은 얼마나 광할하고, 우리는 그만큼의 오판을 얼마나 많이 번복하고 있을까. 그러한 맥락에서—언제까지나 화언의 개념이긴하나—조력 행위는 조력자의 자만심을 채우는 짓거리에 그치고 만다. 모순적이게도, 화언은 그가 거부해 마지않던 것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머리 하난 남들보다 비범했단 점은 그렇다 쳐도, 그는 앞서 언급한 비관적 사상 외에도 곰살맞은 면이라곤 일절 없는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다소 불가해한 선택이었으나, 진의는 그만 알고 있을 터. 즉 이에 대해 타인이 재단할 자격이 있겠냐마는, 결코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닐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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