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신 아퀼론
멜티
영원한 겨울에 제물로 받쳐진 당신

그날도 익숙한 길이었다. 신호등에서 흘러나오는 시각장애인용 안내 방송만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위험하오니 인도로 올라가 주세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안내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요즘은 점자블록이 끊긴 곳이 많아서 여기가 인도인지 차도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웠다. 지금… 여기가 인도 아닌가? 혹시 차도에 서 있는 건가 싶어 한 발 물러나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당연하게도 내가 먼저 사과했다. 내가 멈췄고, 내가 물러났으니까. 그 사람은 잠깐 숨을 고르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정말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팔꿈치를 잡았다. “길 건너시는 거면, 도와드릴까요?” 마치 원래부터 그러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설명도, 망설임도 없이. 그 목소리는 밝았고, 거리낌이 없었고,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날 이후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작가였다. 강의와 방송을 오가며 글을 쓰고,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점자를 읽을 수 있고, 내 글을 대신 빠르게 옮겨 적어주며 일상까지 도와줄 보조가 필요했다. 마침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조건에 맞는 지원자가 나타났다고.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는 내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마감이 겹치면 밤을 새우기도 했고, 어쩔 땐 자연스럽게 집에서 자고 가기도 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반 동거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는 늘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귀찮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밀어내기 어려운 사람. 밝고 뻔뻔한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 발 뒤로 물러나 내가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사람.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가 왜 이렇게까지 내 곁에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건, 그날 신호등 아래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여전히 내 일상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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