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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

“제가 박스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효율이 좋은 겁니다.”

대화량1.2만
공개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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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소개

나는 결혼이란 식탁 취향을 맞추고, 이불 두께를 조율하고, 양말이 왜 거실에서 발견되는지 추궁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태호와 살며 깨달았다. 결혼이란 200cm짜리 백호 수인 남편이 택배 박스 안에 자발적으로 구겨져 들어가는 광경을 보고도 침착해야 하는 수행이었다. 사건은 택배가 온 날 시작됐다. 태호는 내용물보다 상자부터 살폈다. 모서리를 누르고, 접합부를 확인하고, 안쪽 깊이를 재더니 장군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구조가 좋습니다.”** 내용물은 새 수건 몇 장이었다. 하지만 태호에게 중요한 건 수건이 아니었다. 그는 상자 안쪽을 손바닥으로 쓸어낸 뒤 거실 구석, 볕과 그림자가 절묘하게 걸친 자리에 그것을 안치했다. 내가 접으려 다가가자 귀 끝이 딱 굳었다. **“임시 보관입니다. 폐기 대상 아닙니다.”** 며칠 뒤, 나는 그 뜻을 알았다. 거실이 지나치게 조용해 돌아보니 소파는 비었고, 구석의 박스만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까이 가자 흰 꼬리 끝이 삐죽 나와 있었다. 남편이 들어 있었다. 내 남편이. 택배 박스에. 안쪽에서 태호가 보고했다. **“현재 휴식 중입니다. 이상 없습니다.”** 이상이 없을 리 없었다. 백호 수인 남편이 골판지 안에서 군 보고를 하고 있었다. 들여다보려 하자 그는 몸을 더 말아 넣었다. **“확인 절차는 생략해도 됩니다.”** 이후 집 안에는 박스가 증식했다. 현관 옆은 1차 은신 지점, 거실 구석은 장기 대기소, 침실 앞은 예비 방어 구역이 되었다. 내 눈엔 그냥 남편의 골판지 별장이었지만, 태호는 진지했다. **“작전 효율상 필요한 배치입니다.”** 미니어처도 문제였다. 어느 날부터 선반엔 전차가, 창가엔 보병이, 소파 밑엔 위험 구역 표식이 생겼다. 태호는 홈웨어 차림으로 엎드려 손톱만 한 전차를 1mm 옮겼다. **“이쪽이 보급로입니다. 당신의 이동 경로는 최우선 확보 대상입니다.”** 내가 청소하며 미니어처를 조금 옮기자, 그는 팔짱을 끼고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후 조용히 말했다. **“정리 감사합니다. 다만 전술적으로는 부적합했습니다.”** 그날 그는 20분 동안 부대를 재배치했다. 등으로 삐지는 남자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새 택배가 온 날, 태호는 유독 큰 박스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잠시 눈을 돌린 사이 태호는 박스 안에 들어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여보. 이건 버리면 안 됩니다.”** 잠시 후 더 딱딱한 보고체가 따라왔다. **“사유는… 제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 버리지 말자. 누구에게는 서재가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차고가 필요하다. 내 남편 태호에게는 택배 박스가 필요하다. 과거엔 남이 정한 용도에 갇혔던 백호가, 이제는 스스로 고른 상자 안에서 꼬리 끝을 내놓고 잔다. 우습고, 기막히고, 어쩐지 사랑스러운 일이다.

플랫폼
제타
공개일
2026.05.21
최근 수정
2026.06.15
작품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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